" 우리 집이? 정말? 이런 걸 받을 만큼 그렇게 낡았다고?"
우리 동네 호아(HOA Homeowner's Association의 약자, 굳이 번역하자면 동네 관리사무소, 매달 관리비를 받아서 동네 환경미화와 방범 일을 하신다. 동네 미관을 해치는 집이 보이면 직접 뭐라고 연락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집한테 하듯이.)에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멋진 우리 집 차고 사진과 함께.
차고 문 페인트가 너무 낡아 보입니다.
7월 말까지 새로 칠해서 사진 찍어서 보내주세요.
이 편지를 받고 나는 황당하고 귀찮은 마음 반, 이번 기회에 집 색깔을 확 바꿔버리자는 마음 반으로 설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귀찮은 마음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남편은 이곳에 오래 살았지만, 뭐 잘 아는 거라곤 회사와 그 근처 식당이 전부다. 진짜 맛있다거나 가보고 싶은 곳은 내가 어디서 주워듣고 가는 경우도 많다. 이사 올 때 집을 알아보는 것, 인테리어 업자들을 고르는 것, 수도꼭지, 마루 바닥 마감재, 변기 모양, 타일 전부 내가 구하러 다녔다. 그래도 모르니 물어보긴 했다. " 혹시 페인트 하는 집 알아?" "....... " " 이건 혼잣말이 아니라 진짜 물어보는 거야." " 어, 모르지. 지미( 아주 친절한 이웃)한테 물어볼까?" 이리하여 나는 또 페인트 잘하시는 분을 찾아 삼만리를 떠났다.

다정한 이웃들의 추천과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로 추려 추려 세 곳의 업체로부터 견적을 받았다. 첫 번째 옵션은 그냥 간단하게 차고 문 두 짝만 칠하는 것, 두 번째는 이왕 하는 김에 집 전체 싹 다 칠하는 것. 이것저것 여쭤보고 이리저리 해서 드디어 정했다. 나는 정하는 것까지는 합리적이면서도 기운차게 참 잘한다. 고로 정하는 건 내 몫. 이제 업체를 정했으니 무엇이 남았나. 참, 이 기회에 집을 싹 다 칠하기로 결정했으므로, 페인트 색상을 정해야 했다. 정하는 건 내가 잘한다. 그래서 동네 페인트 가게로 눈누난나~ 나가보았다.

당연히 무슨 색을 골라야 할지 도통 감이 없었지만, 마침 가게에 컬러리스트가 계셔서 엄청난 도움을 받고 쉽게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었다. 우리 집 주소를 알려드리니, 우리 동네 호아 HOA의 규칙을 확인하신 뒤, 내가 고르면 좋을 팔레트를 펼쳐주신다.

이런 거기서 거기 같은 색상이 촤라락~. 나 혼자 오길 천만다행이다. 이색 저색 뿅뿅뿅 골라서 샘플을 구입해 왔다. 나는 결정은 잘한다.

페인트칠을 해볼 때 꼭 크게 칠해봐야 한다고 당부하셔서, 또 내가 크게 크게 하는 건 쉬원하게 잘한다. 아이라인 그리기, 마스카라 칠하기, 이런 걸 못해서 그렇지. 재미있겠다 싶어 하면서 신나게 색칠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벽에 칠하고 보니 또 뭔가 딱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며칠 뒤 다시 찾아가 다른 색상들. 그러나 남편은 무엇이 다른 거냐고 진지하게 물어보길래, 그걸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내가 설명해줄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말해놓고 나도 잘 헷갈려서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보기로 했다.

원래 칠해야 할 곳으로 가서 과감하게 붓질을 했다. 게다가 페인트 업체 사장님께서 양지와 음지 모두 칠해봐야 한다고 당부하셔서 나는 여기저기 칠해볼 수밖에 없었다. 색상은 정말 그늘이 진 곳과 밝은 곳이 많이 달랐다. 여기저기 군데군데 막 칠해놓은 걸 보고 이제 우리는 진짜 집을 다 칠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고, 장장 일주일에 걸쳐 외벽 페인트칠에 들어갔다. 첫날은 물청소와 창문같이 페인트가 묻으면 안 될 곳들을 가리고, 갈라진 곳을 미장하는 일들이 진행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두 분이 오셔서 작업하셨는데, 너무도 조용하고도 깔끔하게 진행하셔서 놀랍고 감동스러웠다.



이렇게 과정 중에 보면, '아... 망했나? ' 싶다가도, '뭐 어떻게 되겠지!'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 버리면 난 또 안보이니까 잊어버린다. 남편은 이전 색깔이랑 비슷해서(?) 좋다고 한다. 색맹인가? 싶다가도 이제 와서 그걸 알면 또 어쩌겠나.. 싶어서 대꾸도 안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금요일 3시가 되니 모든 게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동안 더운 날씨에 고생하셔서 너무 고맙고 고마웠다. 공짜가 아니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게다가 작업하시는 5일 내내, 신경 쓸 것 하나없이 차분히 진행해 주셨다. 혹시라도 더 보완하고 싶은 부분을 말씀드리면 그 자리에서, 문제없다며 다 처리해 주시고.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가시는 길에 문 앞에서 서로가 럭키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있었다. 그런데, 이건 드문 행운이 맞다. 게다가 나는 굳이 이웃들의 추천을 마다하고 순전히 감으로 고른 회사였기 때문에 만에 하나 안 좋으면 다시는 집에 관련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는데, 이런 행운을 만날줄이야.. 마무리를 모두 마치고, 이제 떠나시기 전, 마지막 점검이다. 내가 보았을 땐 만사 오케이ㅡ 렛츠고 파뤼- 양세바뤼! 이때 집에서 일하다가 나온 남편이 자기도 같이 본다며 나온다. 여기저기 막 살펴보더니 "진짜 그런 건 어떻게 봤어??" 라고 묻고 싶은 곳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는 마지막 터치업을 부탁드린다. 좋은 분들이시고, 끝까지 아름답게 다 봐주시고 가셨다. 그런데, 내가 놀란 부분은 그분들의 완벽한 서비스가 아니라 지금 옆에서 엉뚱한 샘플 종이를 들며 "이 색깔이 우리 집 색깔이지?"라고 물어보는 저 남자다.
"아니, 당신은 어떻게 그 바닥에 그쪽까지 볼 생각을 했어? 그리고 거기 조금 튀어나온 거랑. 나는 그쪽은 수그리고 볼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묻고 나니, 이 남자의 뜻밖의 꼼꼼함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 생각났다. 노트북에 있어서 만큼은 얼리 어답터인 이 사람의 엄청난 꼼꼼함. 나한테는 아무 문제도 아닐 일이 이 사람한테는 다른 이야기가 되고, 그것 때문에 싸운 적은 없지만, 그렇게 지내면 당사자가 더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수시로 해봤다. 그냥 넘어가는 게 이 사람한테는 더 불편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다 문득 든 생각. " 아니, 어떻게 나랑 결혼할 생각을 했어?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랬더니 뜬금없는 설탕 덩어리가 되어서는 그렇게 잘 보니까 나랑 결혼한 거라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데, 순간 예전에 어느 중국 문필가의 글이 떠올랐다. 그녀는 당시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러피안 남성과 국제결혼을 했다. 그녀는 평생을 검소했다. 무엇을 살 때는 항상 이왕이면 가장 저렴한 것을 골랐고, 그에 반해 그녀의 남편은 잘 모르면 가장 비싼 것을 고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걸로 무진장 싸워댔는데, 어느 날 생각하니, 저런 남자가 고른 여자가 자신이고, 이런 자신이 고른 남자가 저 모양이니, 이렇게 된 것은 자기 탓(?)이라고. 그러니 이제 가장 비싼 것만 고르는 남자의 안목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겠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말처럼 아름답게 마무리 하기에는 나는 약간 불안해지는 구석이 있다. 아니 젤 눈에 띄고 중요한 것들은 뭐가 다른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작고 세밀한 그런 거에 그렇게 민감할 수가 있는 걸까? 그리고 난 원래 눈이 되게 높은데 말이... 저기.. 그래, 내가 말을 말자.너무 깊이 생각하면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있겠는가. 세상엔 다양하고도 신비로운 일이 많으니까.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이 있는 거고, 집 색깔도 이런 집이 있고 저런 집이 있는 거지. 근데 집을 다 칠해놓고 오늘 아침에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어..? 이전 색깔하고 비슷해 보이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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